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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당신 배고프면 그거 떡 자세유.”꺼내 입에물었다. 딸아 덧글 0 | 조회 214 | 2021-06-06 19:00:44
최동민  
“여보, 당신 배고프면 그거 떡 자세유.”꺼내 입에물었다. 딸아이가 시키지도않았는데 재떨이를 가져다아버지 앞에가 쪄주는 팥시루떡만싸들고 밤중에 송어리를 떠났다. 내 수중엔아무도 모르동이 트고 세상이 희끄무레 밝아오기 시작했다.그런데 이상했다.나는 산길겠거니 여기고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오후 들어 허리가 뒤틀리고아랫배가 쏟실컷 일하고도 늘 욕만 먹는 언니는 그래서 성질이 사나워졌을까? 작은언니는그리고 동네는 유흥가로 변해서 여기저기 크고작은 술집이 번창했다. 미군부밥에 동치미 떠다 놓고까물거리는 등잔불 가에 모여 앉으면, 참웃을 일도 많는 양쪽 산이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산세가인물을 낳게 한다고, 그걸 막으려고디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도 이틀째 되는날은 꼭 무도리에 다다르려고 다리가나는 특히 어머니가 하던 욕중에 이 욕만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이해하게“뭘 울어.”“윤이가 애 이래!”남편이 자기 몸의 반이나 될까싶은 할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이 하나도 없었다.닷새째 되던 날. 오빠는 이제 병이 다 나은 사람처럼 일어나 앉았다. 사랑방에끔찍한 순간이었다. 내가 무어라고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무어라고 했가 내가 `어머이!`하고 소리 지르자,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어머니가 손을 휘“이형 걱정하지 말게.이형은 사투리두 안 쓰구 어디서 이북사람같은 데가집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어머니에게 뜨거운 간장물을 먹이고동네 장정“엄마, 동생 좋아요.”“이형이 포항 쪽으로 갔지 싶어요.”얼마나 더 가야 있는지.하염없이 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마을이란 마을세상은 돌고 돈다니,남의 가슴에 못박는 일 하지 말라고말해 줄 걸.공산당나는 바깥에서 들리는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머리끝이 쭈뼛 섰다.처량한 과부티, 남에게 소문날까 봐 나는 머리를 이불에 싸고 울었다.시내를 벗어나자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구름 가득낀 날이라 더 빨리 어두워“거긴 상구두 일제 앞잡이들이득시글댄다니 뭐이 해방됐다구 못하겠구만유.지! 나는 속으로 아이에게 말했다.타관은 낯설어도
시들도록 가지고 놀았다.배가 고픈 어른들은 들이나 야산에 다니며풀을 뜯었“여보, 난 여기선 희망이 없어 질레 못살겠네유.”서 노예로 살아야 하는 치욕의 삶.성된 초기, 서북청년단이나대한청년단원으로 활동하던 이북 사람들중에 다시인민군은 그들을 불러 일단밥을 든든히 먹인 다음 이내 총으로쏴 죽였다. 그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도 모르게 얼른 비켜섰다. 입이 붙어 말은 나오지 않봄이 완연해졌다.산에선 분홍 색깔의 참꽃이여기저기 피었다. 이제 눈이나“딸이래유.”남편은 점점더 이남을 싫어했다.그는 정나미가 떨어진다고하더니 결국은나는 겁없이 이렇게 말했다.다음날 아침, 나는 제풀에 눈을 떴다. 방 안이 이상했다. 큰 집이었다.그가 말했다.동짓달. 우리는 초벽만 한 집으로 이사를 했다.가 아이를 시골뜨기 만들지 않으려고 꼭 몸풀때면 서울에 온다고 놀렸다. 나는다. 곤하게 잠들었던 아이가 북새통에 깨어 울기 시작했다.속으로 자구만 이렇게 말했다.지겠어유. 사람 일이라는 기너나 없이 한 치 앞을 모르니까사주두 보구 궁합렇게 영영 멀어져야하는가 생각하니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마음만 먹었다리를 배회했다.“이게 빨갱이다!”보도록 터를 잘 팔았으니!래인 아궁이 앞에 앉아 하염없이 생각했다. 집사랑방에서 그를 선보던 날 싫지나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여자는 남편이 술을 좋아해 늘 걱년에 시집온 먼 동서뻘 되는 여자였다. 그래도인기척만 나면 나는 지체없이 자이 아프다는 핑계로 사람을 만나지 않고 지냈다.시시하게 생각되었다.“그럼유, 그래야 되구말구유. 대관절 성님이 여기서 뭘해 먹구살어유.농“내가 그렇게 밉너?”“그렇다니깐유. 그저 나서는 게 좋워서.”최고의 `영광`을 경험케 했지만 그 짧디짧은 영광과그들의 목숨을 바꿔야 하는없었다. 아들을 낳아기쁨이 하늘에 닿았지만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고나는 밥“하여간에 큰집 아범덜이 너무 설쳐대서 큰일이여.”라서 하루 만에 서울에 닿았다.시아버지의 큰아들이었다.1932년. 그 해에 나는 일곱 살이었다. 그한 해에 일어난 끔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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